남북 & 북미 정상회담, 적기였나?

연봉협상을 한다고 합시다. 일반적으로 당신보다 당신의 사장이 협상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당신이 다른 회사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경우 얘기는 달라집니다. 다른 회사가 당신에게 제시하는 처우조건이 좋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사장과의 연봉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협상을 파투내버리고 좋은 조건을 제시한 회사로 이직할 수 있으니까요.

이와같이 협상자는 fallback을 가져야만 불리한 상황에 놓이지 않고 협상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 저의 글에서 한국에 핵재처리시설을 갖추어 핵옵션 보유를 주장[1]하거나 미국의 전술핵 배치를 지지[2]한 것은 이것들이 대북 핵협상에서 fallback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은은 왜 지금 협상에 나섰나?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실효성있는 대북제재가 시작된지 겨우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경제제재의 압박에 못 이겨서 백기투항한 것이라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김정은은 아직 자신이 보유한 fallback이 소모되지 않았을 때 협상에 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김정은의 fallback은 아직 ‘고난의 행군’을 시작할 만큼 경제상황이 고통스럽지는 않다는 것, 즉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몇 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확보했다고 알려진 핵탄두 역시 협상의 fallback이 되겠죠.

한국 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할 때 자주 범하는 착각 중의 하나는 착한 자는 세련되고 현명한 자이고 악한 자는 추하고 멍청한 자라는 것입니다. 선함과 현명함, 악함과 아둔함을 동일시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죠. 착하면서 아둔한 자도 있고 악하면서 현명한 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김정은은 악당이지만 영리한 협상가입니다.

다시 연봉협상 얘기를 합시다. 스카우트 제의를 협상의 fallback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사장에게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얘기하기는 곤란한 노릇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감정이 상해서 협상자간 신뢰관계가 틀어지고 상대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당신이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사장이 눈치 채도록 해야 협상에서 fallback이 제대로 작동합니다.

김정은은 문재인의 입에서 북한의 ‘핵동결’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3]. 김정은은 자신의 fallback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도 트럼프가 알 수 있도록 함으로써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북미 직접대화만을 추구하면서 한국을 패싱하다가 왜 갑자기 문재인을 중간에 두고서 트럼프와 협상하려고 했을까요? 현시된(revealed) 사실만을 가지고 해석하자면 김정은은 문재인을 트럼프와 협상의 레버리지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이 착하지만 아둔한 협상가인지, 아니면 김정은의 payoff함수에 자신의 선호체계를 일치시켜버려서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평가를 유보하겠습니다.

저는 한미가 대북제재와 더불어서 군비경쟁을 지속하는 것이 북핵 폐기를 위한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1]. 경제제재와 군비경쟁을 2-3년 지속한다면 북한은 한미보다 먼저 지치리라고 보았던 것이죠. 그런데 트럼프는 왜 이리 급하게 김정은의 협상제안을 받아버렸을까요?

작년에 괌을 포위사격하겠다고 하면서 실행하지 못했으니 김정은이 미국에 무력으로 도전하겠다는 것은 허풍으로 탄로났었죠. 그런데 김정은이 미국으로 핵탄두 운반수단인 ICBM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에도 트럼프 역시 북한을 폭격하지 못한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아니면 ‘로켓맨’을 제거하기라도 했었어야죠.

트럼프는 일단 북한 선제타격을 실기(失期)했습니다. 트럼프는 결국 미국 국내에서 자신이 처한 정치적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중간선거 전에 무엇이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협상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일단 북핵의 폐기를 위한 협상이 시작된 이상 이 협상은 반드시 타결되어야 합니다. 이 협상은 매우 위험한 협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일단 협상을 시작한 이상 만약 협상이 결렬돼 버린다면 무엇이든 후속조치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빅터 차 교수는 협상을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4].


[1] 무서운 이야기: 벼랑끝 전술과 위험의 경사구조
https://forestofscholar.blogspot.kr/2017/12/blog-post_81.html

[2] 진보적 국제정치학자도 전술핵 배치를 주장한다.
https://forestofscholar.blogspot.kr/2017/12/blog-post_5.html

[3] '北조치는 핵동결' 규정한 문 대통령…북핵폐기 '입구' 들어서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10042477

[4] 빅터 차 “북미 정상회담,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전쟁 날수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314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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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저는 북미의 협상이 타결되리라 예상합니다. 그러나 북핵은 폐기되지 않은 채 시간만 지연되리라 전망합니다. ‘위장된 평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문재인, 트럼프, 김정은은 각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소기의 성과는 얻겠죠. 문재인과 트럼프는 위장된 평화를 국내정치에 이용할 것이고 김정은은 크지는 않지만 쏠쏠한 보상을 챙겨갈 것입니다. 이렇게 전망하는 이유는 일단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부터 지켜보고 추후에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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