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의 폐기 or 한반도 비핵화?



화려한 의전, 외교적 수사, 낭만적 연출로 점철된 남북정상회담을 잘 감상하셨나요? 이제 다시 감상적 민족주의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회담의 결과물로서 명시적으로 공표되고 기록된 ‘판문점 선언’을 해석하고 평가해봐야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이번 판문점 선언은 다소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학점으로 치자면 아예 낙제점인 F까지는 아니지만 낙제만 면한 C0 정도라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의 1)~3)과 같습니다.

1) 북한이 원하던 경제지원 사업들을 대부분 약속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적입니다. 그럼에도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들의 개시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2) 당초 회담의 성과로 예상되던 것들이 후퇴했다는 점은 부정적입니다. 예컨대, DMZ 내 GP를 철수하자는 제안과 남북의 종전선언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죠.

3)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를 삽입했으나 ‘단계적.동시적 조치’라는 북한의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점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판문점 선언[1]은 ‘1. 남북 관계의 개선과 발전, 2.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 3.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3가지 의제를 다루고 있고 의제별로 3~6개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만, 선언문은 ‘미려한 외교적 수사’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이들을 걷어내면 내용이 많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외교적 수사들을 걷어내고 의제별로 선언문을 해석하고 평가해보겠습니다.

먼저, 의제 #1인 ‘남북 관계의 개선과 발전’ 부문에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했는데 저는 이를 찬성합니다. 사실은 아예 서울과 평양에 각자 연락사무소를 두는 것이 맞습니다만, 아마도 각자 상대방의 스파이 활동을 염려해서 개성에 쌍방의 당국자가 상주하는 연락사무소로 합의했으리라 추측합니다.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 공동 진출은 저는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보다 젊은 청년층에서 섭섭하게 생각할 수는 있겠죠. 이산가족.친척상봉이야 모두 찬성할 것이고,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도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전선을 우리가 이탈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북한의 핵폐기가 완결된 후에야 사업의 시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아마도 문재인과 김정은도 이를 의식해서 사업시기를 명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제 #2인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 부문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 중지 조치는 찬성합니다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것이야 남이든 북이든 여차하면 얼마든지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오히려 회담 전에 언론의 추측보도가 난무했던 DMZ 내 GP철수 제안[2]이 포함되지 않은 점이 의아합니다. GP철수에는 김정은이 부담을 많이 느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해 NLL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자는 합의는 글쎄요... 실현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야 서해 어민들이 불법어업을 하는 중국 어선들을 쫓아내고 싶어서 차라리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해서 남북이 공동관리하자는 주장을 지지하는 모양입니다만,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고 나면 북한 어선들과 어장을 공유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중국 어선들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아 실익은 없으리라 봅니다. 남한의 해경과 북한의 해군이 공동으로 경비하다보면 NLL무력화 논란이 또 발생할 것이고 우발적 충돌이 없을 수 없을 텐데... 그러다보면 어민들의 여론이 뒤집어질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가장 중요한 의제 #3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분야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담 전에 남북만의 종전선언 또는 평화협정을 예상하는 보도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선언문에서 빠져버렸네요. 아마도 김정은이 남북만의 종전선언에는 반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남한은 종전협정의 대상이 아니고 미국과의 협정을 주장했지요. 이번에 선언문에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회담 개최를 추진하기로 했는데 전통적으로 북한이 요구하던 Offer에 문재인이 남한을 끼워 넣어 Accept한 것이라 봅니다.

사실은 종전협정은 미국도 원하던 것이었죠. 2006년 당시 부시는 노무현을 만나 남북미 3국이 종전협정에 서명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후 노무현은 2007년 김정일과의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추진하자는 합의를 했었죠[3].

며칠 전에 포스팅한 것[4]처럼 저는 종전협정을 맺으려면 남북미중 4자가 체결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만, 협정의 디테일이 나오기 전에는 찬반여부를 유보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북한의 핵폐기와 관련하여 선언문의 의제 #3 부문 4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④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하였다.”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회담 전부터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만 넣어도 이 회담은 성공이라는 언론플레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역설적으로 비핵화 관련해서 북한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 챘었습니다.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목표가 바로 ‘한반도 비핵화’라는 것인데, 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의 해석에 있어 의견이 분분하죠.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것은 이른바 ‘단계적.동시적 조치’라는 것입니다.

먼저 ‘단계적 조치’라는 것은 문재인이 수용한 것처럼[5][6] 북한의 핵동결->폐기로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북한의 핵탄두 생산 중지 -> 국제기구의 핵탄두 생산시설 사찰 -> 기존 핵탄두의 상호(?) 감축으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프로세스를 말합니다. 이런 식의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트럼프나 문재인의 임기 내에 완결되기 어렵지요.

다음으로 ‘동시적 조치’라는 말은 북한이 각 단계별로 조치를 취할 때마다 한미가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동시에 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응하는 조치는 경제적 보상일 수도 있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해제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 보상에 대해 한미 양국의 국민정서는 대체로 북한의 요구처럼 단계별로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죠. 지금까지 북한은 중간에 일단 보상만 챙겼다가 수틀리면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짓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단계별로 상응하는 보상체계는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해왔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동시적 조치’인 핵우산 해제와 관련하여 한겨레신문은 북한이 북미의 정상회담 실무접촉에서 ① 미국의 핵 전략자산 한국에서 철수, ② 한.미 연합훈련 때 핵 전략자산 전개 중지, ③ 재래식 및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 ④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 ⑤ 북한과 미국의 수교 등을 제시했다고 보도한 바 있었습니다[7].

황당한 요구입니다. ‘핵 전략자산’이란 것은 핵무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핵투발이 가능한 미사일, 폭격기, 잠수함 같은 군사적 자산을 말합니다. 그런데 미사일을 쏘지도 못하고 폭격기도 띄우지 못하며 동해에서 잠수함 작전도 하지 못하는데다 핵무기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로 공격할 줄도 모르는 주한미군은 어디다 씁니까?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북한의 요구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해제와 사실상 주한미군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NL류의 공상적 민족주의에 오염된 사람들이야 이런 식의 북한의 주장을 반길 수도 있겠지만 저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억지스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밀려오지요.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언론이 언급하지 않던데, 의제 #3의 4항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했다는 말에 주목합니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1)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각자가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남북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2)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도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요.

남북 각자에게 책임과 역할을 부여하는 중요한 문구인데도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서 해석하기에 따라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청와대가 이 문구를 제대로 해명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1]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https://forestofscholar.blogspot.kr/2018/04/blog-post_27.html

[2] '한반도 화약고' DMZ, 평화지대로...적대행위 중단 가능할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8568948

[3] 종전선언 전에 풀어야 할 숙제 3가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77&aid=0004228085

[4] Negotiator or Broker?
https://forestofscholar.blogspot.kr/2018/04/negotiator-or-broker.html

[5] 청와대 "'先핵폐기 後보상' 리비아식 해법 북한에 적용 불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992589

[6] '北조치는 핵동결' 규정한 문 대통령…북핵폐기 '입구' 들어서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10042477

[7] “북, 비핵화 대가 5개안 미국에 제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406158


#김정은  #남북정상회담  #문재인  #비핵화  #판문점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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