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관료의 덫, 그리고 벌거벗은 임금님



정부정책의 주도권을 청와대가 틀어쥐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정부부터이다.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던 김영삼은 강력한 청와대를 구축하여 정부를 통제함으로써 정치군인들의 입김을 배제하려는 집권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집권말기 외환위기를 감지하지 못했지만 김영삼의 강력한 청와대는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정부 곳곳에 산재해 있던 하나회 인맥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 금융실명제를 밀어부쳤던 것도 청와대의 작품이었다.

‘관료의 덫’은 대통령이 관료들의 논리에 매몰되어 정부가 개혁성을 잃고 진부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외환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던 김영삼 뿐만 아니라 이후의 대통령들도 모두 집권 2년차가 지나면 관료의 덫에 빠져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노인네로 전락해버렸다. 일례로 김대중의 경우 수십년간 야당 생활만 하면서 참모들이 쪽지에다 적어주는 메모 수준의 보고만 받다가 집권하고나니 관료들이 써준 두툼하고 논리정연한 보고서에 쏙 빠져버렸다고 한다. 관료의 덫에 빠지고 나면 장관들은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적 책임을 져주는 심부름꾼이고, 여야의 국회의원들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말싸움만 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놈들이라는 일반의 시각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관료의 덫은 김영삼의 청와대처럼 대통령이 관료들을 멀리하고 두터운 참모진에 둘러싸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통령→비서→부처로 연결되는 명령체계 하에서는 부처의 관료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대통령의 비서들에게 줄을 대려한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대통령 비서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비서들은 대통령의 심기경호를 위해 관료들의 논리에 의존하게 되고 대통령은 더욱 비서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결국 관료→비서→대통령으로 의사결정 전달체계가 완성되고 대통령은 단순히 관료의 정책을 공식화하는 도구로만 기능하게 된다. 극단적인 사례가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비서들에게 둘러싸여 장관 대면이 뭐가 필요하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노무현도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 의사결정의 95%를 비서실장이 했다고 자랑삼아 떠드는 정도니 나라꼴이 그 모양이었지.

관료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청와대 참모진의 힘을 빼야 한다. 비서는 의사결정의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니므로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역할에만 전념하는 것이 맞다. 실력있는 대통령이라면 장관들과 자주 대면하여 정책토론 하는 것을 주저해선 안된다. 비서들과의 회의에서 발언이 대통령의 공식메세지가 되는 풍경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국정의 중심은 비서들과 모여 앉은 수석보좌관회의가 아니라 장관들이 대통령과 함께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국무회의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여당의원들과 입씨름이라도 자주 하고 야당대표에게 “뭐가 불만이냐”는 전화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기자회견에 나서 불편한 질문에 답하는 일도 자주 해야한다.

관료의 덫에 빠지는 것은 대통령에게도 불행이다. 바보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옷을 걸친 ‘벌거벗은 임금님’을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의혹 제기한 놈을 고소해서 300만원 벌금형 전과자를 만들고, 타당의 의원들에게 문자폭탄을 쏟아 부으라고 선동하는 여당의원이 있는가 하면, 김여사에게 ‘여사’를 붙이지 않았다며 기자 한 놈을 아작내어 버리거나 ‘대한미국’ 이미지를 조작해서 언론에 덮어씌우려는 문위병들의 이지메 행동, 노무현 청와대와 데칼코마니 같은 두터운 참모진까지 지켜보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기우인가?

여론조사가 민심의 저변까지 온전히 대변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국정지지율에만 매달리다 보면 얼굴패권이니 잘생긴 대통령이니 하던 문비어천가가 조롱의 언어로 되돌아올 수 있다. “임금님이 빨개벗었네”라며 깔깔대던 ‘버릇없는 꼬마’가 꼬옥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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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9일에 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48787889029979&id=100016963067261


#관료의덫  #대통령  #벌거벗은임금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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